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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파울 클레 스토리

아들과의 즐거운 나날들-23

클레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데요

오늘은 클레의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기분 좋은 기억을

이야기합니다 -23

 

 

 

 

전쟁이 계속되던 '무시무시한 세계'에 대응하여 그의 작품에는

더욱 더 많은 많은 추상적인 형태가 나타났다.

이런 불확실한 시기 동안 그는 그의 창작품에 대해 끝없이

질문하는것을 멈추었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 충분한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915년 그림에서 클레는 입체파 화가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표현했는데 그 표현인즉 시인 화가 였다.

시를 쓰면서 그림도 그리는 예술가는 테이블 가까이에 앉아있다.

 

그는 외부 물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그의 정신적 상상들을 그림으로 바꾸어 내려는듯이 말이다.

펠릭스 클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아버지에대한 나의  최초의 기억은 1912년으로 되돌아간다.

그해 우리는 바텐베르그의 튠(thoune)호수가 있는 보 서쥬르(beau-sejour)

호텔에서 휴가를 보냈는데, 그 호텔은 나의 대고모 루이스(louise)의

것이었다. 베른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철도 역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뱀 한마리가 먼지가 이는 길을 지나가고 있는것을 보았다. 우리는

숨소리를 죽이고 파도처럼 물결치는 뱀의 자취를 보고 감탄했다.

 

뱀이 사라지고 우리는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곤 했다. 내가 자꾸 뒤를 돌아보느냐고

묻자 '뱀은 자신의 꼬리를 물고, 몸뚱이를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굴렁쇠 모양으로 굴려서 사람을 따라 올 수 있거든.그래서

혹시 그 뱀이 우리를 따라오고 있지는 않은

지를 보려고 둘러본 거야.라고 했다.

 

 

 

1916년 아버지는 내게 작은 인형을 만들어 주기 시작했다.

1925년 까지 내 연극을 위해 50개의 인형을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들중 30개는 아직도 남아있다. 아버지는 나의 그림을

주의 깊게 보았으며 내가 그렸던 그림을 모아서 그가 만든 것 이상으로

정성스럽고 조심스레 진열해 주었다.  

 

 

그리고는 내가 그림들에 붙여 줬던 제목들을 써 놓았다.

나는 아버지가 부엌에서 에칭을 준비하거나 물감을 개거나

혹은 칠을 하거나 소묘하는 것을 자주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밤에는 그의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를 듣곤 했다.

우리는 아인밀러 거리 32번가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거실, 가족이

함께 쓰는 침실 집에서 가장 큰 방인 음악실이 있었다.

 

 

 

그것은 현대음악이 아니라 바흐, 헨델,하이든,모짜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같은 고전적인 것이었다.

아파트에는 스토브와 가스등이 있었고, 욕실에는 읽을 책들과

나무를 때야 하는 욕탕이 있었다. 욕실로 가는 복도는 길었고 손님들이

기거하는 방이 따로 있었다. 또 나의 아버지가 일하는 큰 부엌과

겨울에는 냉장고 역할도 하는넓은 발코니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