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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파울 클레 스토리

바우하우스에 대해서 알아보기-28

현대 디자인의 산실이 되는 바우하우스에 대해서

알아보는데 클레의 바우하우스에서의 생활은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바우하우스는 독일의 공화다수당에 의해 설립되었다가 나찌에 의해 문을

닫아야했던, 바이마를 공화국과 흥망을 같이 했다.

 

바우하우스의 목표는 서로 다르지만 기능적 교양과 조형 예술적 교양을 하나의

건축 예술에 불가분의 성립요소를 종합해서 현실 생활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개회선언을 보면 이렇게 적혀있다.

[우리는 현재 존재하고 있는 예술가와 기능공 사이의 높은 벽을  허물고

새로운 기능공들의 법인단체를 만들고자 한다. 우리는 또한 건축과 조각,

회화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며 미래의 새로운 건축물을 함께 구상하고

설계해야 한다. 이건축물은 수천 명의 인부들의 힘에 의해 앞으로의

세계에 믿음직하고 투명한 상징물로서 하늘높이 세워질 것이다.

 

우리의 마지막 목적은 아직 멀었지만 가장 위대한 작업인 예술을

한데 붙이는일이다. 그일에는 기념비적인 예술과 장식용 예술 사이의

차이점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파인아트를 위한 학회이자 예술 문화를 가르치는 완전한

대학 수준의 학교로 여겨졌다.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에 부여한

개방적 형태는 그의 열린 마음에서 부터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실현 가능성있는 것과 모든 창조적인 것은 즉시 허용되었고 프로그램이

적절하게 바뀌기도 했다. 자유로운 창조적 분위기는 학생들과 선생들에 의해

나타나곤 했다.

 

만약 그로피우스가 예술비평정신을 저버렸다면 그시대에 아주 잘 알려진

다리파 화가들이나 바우하우스의 에밀 놀데, 코코슈카같은 표현주의 화가들을

선생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로피우스는 그들의

몇명의 추종자가 그들의 이름이나 작품을 알고 있을 정도의 화가 클레나

칸딘스키를 받아들였다.  

그당시는 클레나 칸딘스키의명성이 독일 국경을 거의 넘어가지 못했었다.

 

 

      우리는 바우하우스시절의 화가들에 대해 자주 말하지만

그들은 한정된 프로그램만 가지고 있는 단체는 아니었다.

모든 바우하우스의 선생들은 예술가로서 뿐만아니라

한인간으로서 독립된 개체였다. 선생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학생들에게 어떻게 보여 주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고 가르치는데 있어서도 그들을 다스리는 규율에

대해서 만큼이나 객관적 존재의 기본적 형태, 색채에

대해서도 고심했다.

 

 

 

회화는 건축과 함께 바우하우스에서 중요하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학생들 중에는 순수회화를 더 좋아하는 부류들이 있어서

그들은 회화만 전시할 수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칸딘스키,클레, 파이닝거는 그들을 항상 도와주고 충고해 주려 했다.

따라서 교수 방법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 사실을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클레와 칸딘스키가 그들의 작품에 쓰던 시적이고 낭만적이면서도

풍자적인 방법과 같은 교수법이 기하학적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점,선,면과 회화에 나타난 사상들,은 그들의 바우하우스 시절 교수법을

종합한말이었고 예술에 대한 중요한 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