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찌에 의해 유태인이며 외국인이라는 모욕에 아카데미에서
일자리를 잃고 프로방스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의 강의와 작품들은 학생들의 깊은 자질을 현저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아주 크게 기여했다. 클레는 그의 풍부한 지식과 작품에 완전히
몰두하는 한 인간의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분명히
우리에게 교훈적인 수업을 하고 갔다.
1931년 부터 1933년 까지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있었던
클레는 주로 그의 수업 시간에 학생들의 작품을 교정해 주는데
열중했다. 그의 작업실에서 그룹으로 함께 일하는 자유로운
분위기로 자신의 작품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작품에 대한
토론과 잦은 비평이 자연스럽게 오고갔다.
리네란트의 작은 파리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있던 2년은 매우
즐거운 것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젊음에 둘러싸이고 싶어했던
그의 욕망과 그자신의 일과 관련하여 독립을 필요로 했던
두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1925년 이후로 몇몇
그림에 죽 사용해 왔던 점묘 화법에 의한 작은 그림들을
뒤셀도르프에 있던 시절에 그렸다.
그는 그리스 비극을 계속 읽었고 원서로 된 [파르치팔]을 읽었고
석가모니의 설법을 읽었으며 서사시[마하브하르테]도 읽었다. 그리하여
클레는 1932년 10월 나찌에 의해 문닫게 된 바우하우스에 더이상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 예술에 대해 특히 클레에 대해 모욕과 공식적인 공격을
한 나찌의 '타락자'는 더욱더 악랄해져 갔다.
유태인이며 외국인이라고 낙인 찍힌 그는 1933년 4월 21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마저도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만약 그가 데사우에 있었더라도 같은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1933년 가을 그는 프로방스 지방으로 혼자서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10월 10일 성 라파엘에서 그는 이렇게 릴리에게 썼다.
-모든 것이 편견없고 제한 없는 곳에서는 기분 좋은 뭔가가 있소.
얼마있지 않아 이 지방은 정신을 중요시 하지 않는 물질적인 세계의
침투에 대해 저항하는 유일한 지방이 될것 같소.-
10월 15일에는 포르트 코르스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 나는 길이 없는 천국에 있소. 이곳엔 인도의 노새가 다니는
길이 있을 뿐이오. 가끔 노새가 다닐뿐 차는 전혀 없소. 여기엔
해로운 것이 아무것도 없소. 전깃불 조차도 없소. 대신에
집의 모든 귀퉁이에는 예쁘고 따뜻한 파라핀램프가 있다오.
여기엔 호텔조차 없는데 탁자나, 의자, 접시,냅킨들은 모두 완전히
같은 스타일로 되어있소. 그리고 가장 훌륭한 것은 여기의 바다는
깊다는 것이오. 잊고 있었던 예전의 것과 다시 가까워 졌소.
태양은 웅장하게 지고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찬양하오.
미의 여신 비너스는 눈부신 태양이 사라져 아쉬워하는
나를 위로하고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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