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의 말년은 병으로 인한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그림을 손에서 놓지않는 열정이 숨쉬고 있었다.
파울클레의 아들 펠릭스클레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아버지가 모든걸 다시 시작하려고 스위스로 갔다고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정신적인 쇼크로 인한 것이었다.-
클레는 그로만에게 이렇게 썼다.
-내가 예전에 작은 오케스트라 단원이었을 때 처, 나는 다시
그림 그리는 것을 시작했네-
펠릭스는 이렇게 말했다.
-바우하우스와 뒤셀도르프 학교생활 이후에 그는 다시 작은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곳은 그의 훌륭한 마지막 작품을 완성시켰던
바로 그방이다. 그는 먹고 살만큼 충족한 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의 성공을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의 성공은 2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났지만 많은 유럽의
미술상들이 이민해 갔던 미국에서의 성공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베른에서 클레는 여전히 옵스베르그 6번가의 작은 집에서 살고 있던,
클레의 아버지와 여동생 마틸드와 함께 지냈다. 그는 키츠베르그 6번가에
그에게 적당한 3개의 방이 갖춰진 작은 아파트를 발견했다.
가장 큰방은 작업실로 사용했고 다른방은 그랜드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있는 음악실로 꾸몄다. 부엌은 다른 모든 것을 할 수있도록
만들었고 클레가 살던 공간은 클레 자신의 유일한 생활 공간이 되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미술 작업을 위한 대륙, 음악을 위한 섬, 그리고
음악과 미술 사이에서 대화하는 문이 그것이었다.
그의 창조적 기운이 가득한 공간은 완전히 기본적인 것이 되기 위해
줄기도 하고 압축이 되기도 했다. 이 닫혀진 문들로 부터 세상을
발견한 후 그는 작업실에서 그 세계를 정밀히 조사했다.
이작은 연구실 같은 아파트는 게오르그 발타이에가 쓴 '내적 경험'이라는
책에 나오는 장소였다.
-간절히 원하는 상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결핍된상태, 잘못된 후퇴인
책임회피적 상태에 그가 매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클레의 전기작가,빌 그로만은 클레의 마지막 몇년동안 만났던
몇 안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그들의 우정은 예술적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 측면에서도 클레에게는
참 중요한 것이었다. 릴리는 그로만에게 1936년 10월 24일
편지를 썼는데 '두분의 우정은 예술적인 면 뿐만아니라
도덕적인 면으로도 외로운 그에게 주어진 하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가끔 남편도 그렇게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난 해에 가장 외로움을 느꼈던 것은 병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는 것일겁니다.'라고 했다.
1935년 여름동안 공피병(피부가 굳어져 나무 조각처럼 되는
피부병의 일종) 의 증상이 처음 나타났는데 병의 증세가 차차
두드러졌다. 그 병으로 그는 5년 후에 죽게 된다.
1935년에베른 예술박물관과 바젤 예술 박물관에서 클레 작품의
중요성을 완성하고 회고전을 가졌다. 그는 투병 중에서도 1936년을
제외하고 죽을때까지 예전처럼 열심히 작품활동에 열중했다.
그가 만든 작품은 보통 수백개에 이르는데 나중에 그 수는 55개밖에
안되었다. 1937년 그의 처음 외출은 카딘스키의 전시회 때였는데
그전시회는 베른 예술 박물관에서 2월과 3월동안 계속 되었다.
같은 해 브라크와 피카소가 그를 방문했다. 피카소는 클레의 정밀화를
칭찬했고 베른을 떠났던 클레에 대한 인상이 어떠했는냐고
물었을 때 파스칼과 나폴레옹을 합쳐 놓으것 같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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