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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파울 클레 스토리

독창적인 클레의 작품세계-53

독창적인 클레의 작품세계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에나 강의에서 한 구절을 보면 노발리스의 낭만주의에 대한 정신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클레의 말을 보면 '모형에서 모체에

이르기까지 사기꾼들, 즉 예술가들은 그들의 글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원칙으로 돌진하고 또 몇 명은 계속되고

있는 모든 진전에 의해 비밀스러운 근본으로 돌진한다.

 

이곳은 우리가 창조를 만들어 내는 가슴과 두뇌라고 부르는 시공간 에서

중요 기관의 움직임인 모든 기능에 활기를 주는 곳이다. 어떤 예술가가

그런 곳에서 살고 싶지 않을까? 깊은 근원 속에서 자연의 가슴속에서

묻힌 모든 창조물을 열 열쇠는 어디에 있는가?'

 

거의 같은 때에 철학자 헨리 베르그송은 '창조적인 진화'란 작품을

내 놓은 파리에서 똑같은 발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창조적인 진화는

클레에게도 얼마전에 나타났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연이란 예술이 충실히

그대로 베껴서 이루어지는 형태가 아니라, 예술가가 자신의 힘을

더할 수도 있고 또 더해야 하는 하나의 독립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부터 더이상 자연을 그대로 베낀다던가 혹은 자연과 경쟁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연과 협력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는 스피노자의

형성되고 있는 자연과 실현된 자연 사이의 구별을 발견했는데

후자는 단지 전자가 순간적으로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후자 즉 실현된 자연은 그것이 현존하기 때문에 더 관심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나 강의에서 한 다른 말은 이 주제를

보다 선명히 나타냅니다. '무엇보다도 예술가는 많은 실존주의

비방자 같이 자연의 명백한 형태에 강요되어 중요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예속된 느낌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 예술가에게 정적 형태가

자연의 창조적 과정의 기본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형성되고 있는

자연이 그에게는 실현된 자연보다 더 많은 것을 준다.'

 

어떤 이유로 이미 형성된 자연과 이미 실현된 가능성을 재생시킬

것인가? 아직 생명이 없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힘을

통해 근본이 되는 것에 뛰어들고 모든 변형된 것의 중심부로

뛰든다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가 1906년 클레는 일기에 이런꿈을

써 넣었다. '창조가 시작되는 곳에 나는 서있다. 나는 내가 존경해

마지않던 부인 옆에 있었는데 그 부인이 가진 본래의 요소는 창조적

풍부함을 확신하게 한다.'

 

그리하여 클레는 모든 가능한 형태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자연과

협력자가 되었다. 클레가 우리에게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보여 줄 수 있었던 것은 이자연과 협력자 관계 덕분이었다.

예를들면 '나사모양의 꽃들'에서 볼 수 있는 새로운 식물.

'경멸적인 동물과 동물 기념비'에서 볼 수 있는 완전히 믿을만한

동물 우화와 전에는 전혀 보지 못한 외관과 유토피아같은 건축물과

아직 발명되지 않은기계 등과 같은 것이다. 클레는 열쇠 구멍과 같은

작은 창을 통해서 보아야했고, 우리가 예전에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별들의 세상을 2센티미터로 된 정방형에서 발견해야 했다.

 

클레는 예술작품을 자율적인 생물체로 보았다. 생물체는 정확한 기원에

따라 발전하고 그 기원과 관련된 기능과 특수한 법칙을 가지고 있다.

이런 법칙들을 무시하거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게 되면 생물체가 죽게 되거나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법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클레와 칸딘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생물체는 정신적인 것으로

부터 생명을 부여 받아야 한다. 화가가 작품을 만들기에 앞서 법칙들을

따로 떼어놓고 보려고 하는 것은 그법칙이 둘레에서 벗어나는 일없이

그저 자연으로부터 떨어져서 작품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보여 주려는 것이라고

클레는 우리에게 이해시키려 한다. 그는 또 '법칙이란 것은 단지

자연과 예술의 확실한 기초공사일 뿐이다.' 라고 했다.

 

위의 문장은 초현실주의자들이 클레를 자신들과 같은 성격을 지닌

예술가라고 주장한 커다란 실수를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자연을 부정했듯이 모든 법칙을 부정했기 때문에

그들의 기형적인 형태의 예술은 거의 발전할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클레는 신중하고도 세심한 건설자였다.

그는 그가 칭송하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이 울부짖지 않았으며

예술가는 자신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의 세계는 '중간적인 세계'이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들의 세계'이고

불가능한 것과 실재하는 것 사이의 존재하는 세계이다.

그 세계는 실현될 수 있고 또 실현되어야한다. 그 세계는 예술가 혹은

자극을 기다리고 있다.

 

파울 클레는우리가 이 중간에 존재하는 세계를 연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그림들은 더하고 덜 할것도 없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모든것은 적당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고, 그감각들은 모두 온전하게 균형잡고 있다.

 

내부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이런 공상들은 어떤 삼단논법보다도 더

예리하고 섬세하다. 예를들어 현미경의 빛 아래에 염소산 칼륨 결정체를

보라 그리고 보여지는 요정 나라의 형태와 색이 질서와 절제로 이루어진

왕국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 않는 원소는 하나도 없다.

 

이 매혹적인 세계는 공상이라고는 존재하지않는다. 그리고 그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꿈은 단지 세상의 원소같이 있을 자리에 있어야

하는 냉혹한 필요성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클레의 작품과 같다.

'만약 그림이 귀엽게 생긴 수정이나 반짝거리는 광석의 형상이라는

측명만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놀이가 아니고 형태에 대한  깊은 생각으로

생긴 논리적인 결과일 뿐이다.

바우하우스 시절 강의 시간에 그는 깊은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을 것이다. 여러 형태들이 결합될 수 있는지의 여부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들은 연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그림은 특별한 부분에서 특별한 선을 그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결과를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