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의 관계와 그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르트르와의 관계에서 클레의 그림을 보고 감상을 적는 부분이
많이 있음을 알 수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역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사르트르는 [무엇이 문학인가? what is literature?]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꽃다발과 소스 그릇에 담겨져 딸랑 딸랑 소리를 내는 스푼은,
최고의 위치에 있는 것들이다. 그는 소리나 형태의 질에 대해 주장하고
끝없이 그 성질로 돌아와서는 그 자신이 그 성질에 매혹되기도 한다.
이것은 그가 캔버스에 나타내는 색과 대상이 되는데 그는 캔버스에서
변형된 것을 상상적인 대상으로 표현한다. 그리하여 그는 색깔과 소리를
언어로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르트르는 여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표시이기도 하고 대상이기도 한 그림을 동시에 만들고자 하는 클레의
시도는, 그의 위대함이기도 하지만 실수이기도 하다.
언어의 문제는 분명히 순수 그림 너머에 존재한다. 그 언어의 문제가
클레를 아직까지도 우리 시대의 가장 활기찬 예술가로 남게 하지만
그의 예술 기교의 섬세함은 시적인 정신과 떼어 놓을수가 없다.
이 두가지는 평범한 인간으로 부터 숨겨진 깊은 힘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클레는 "나의 사랑은 멀고도 종교적이다. 나는 인간과 동물과
식물과 별과 땅과 불과 물과 공기와 움직이는 모든 힘에 적용되는
가설과 수단으로 선택한 곳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라고 말한다.
사르트르의 관찰에 관한 변증법적 구조는 기본적인 역설을 나타낸다.
역설은 상징을 대상물속에서 재생시키고 대상물은 상징으로 변형되는데
상징의 함축적인 기능은 새로운 비판적 표현을 사용하여 신화 창조와
같은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만약 언어적 우주가 원래의 무질서 상태로 되돌아온다면 거기에는
상대적 한계가 없고, 창조되어져야 하는 의식도 없을 것이다.
역설은 인식과 대상사이의 분열된 거리 속에 있다. 인식이란
표현과 그 표현의 내용 사이의 일종의 대화이고 대상이란 자율적인
형태의 인식이란 개념과 직선은 떨어지게 배치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뒤엎어 버리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클레의 그림에 대해 매우 심도있게 얘기했지만
그는 클레의 사상이 영적 과학에 대한 신비판주의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칸딘스키는 예술작품의 주제였던 '예술에 있어
정신적인 것'을 벌써부터 관찰했었고 입체파 화가의 혁명은 결론적으로
대상 속의 그림을 가정하는 이론적 전제에 대한 급진주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현대 예술의 동일화에 대한 표준의 근본은 찾아질 것이다.
그러나 클레의 이론적이고 창조적 작품의 파괴적인 측면은 정확히
이러한 현대 예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기호이기도 하고
대상이기도 한 그의 그림은 더이상 본래의 자신으로부터 오지 않는
형태의 문제를 드러내고, 언어의 퇴화나 변형의 한계를 드러낸다.
현대 예술과는 반대로 그의 예술은 주관적이면서도 형식적인
창작 조건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어떤 의미에서 영적 과학의
이론적 표준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그는 주제의 논증을 빼려고
노력한다. 클레는 전체성에 관한 질문들을 이해하고, 유사한
관계를 다시 만들고 난해한 지식의 한계를 극복했다. 클레 작품에
대한 사르트르의 훌륭함과 실수라는 이론의 관찰은 옳았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멀리 떨어지는 것 즉, 실수는 반드시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비밀스러운 논리에 파울 클레의
진실한 얼굴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그림은 선과 색채 사이에, 혹은 형체와 창조적 기호 사이에 많은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예를들면 대상 자체에 포함되는
절대적 성질에는 평범한 개념이 있다. 선은 단지 사과를 나타내는
바깥 선일 뿐이고 쟁기로 갈군 평야의 경계선 밖에 되지 않는다.
후자의 선은 모든 현대 예술에 의해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 평범한 선에 대한 도전으로 인상파 화가들이 믿어 행했듯이
그림의 모든 선을 배제한다. 그것은 선이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선을 구성하는 요소에 힘을 주고 선을 자유롭게 하는 문제인데
어느 누구보다도 색채를 믿는 마티스나 클레같은 화가들은
아무런 반박도 없이 선의 재등장과 승리를 본다.
'창조적 고백'의 작가인 클레에 따르면 "예술은 시각적인 것을
다시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것을 그대로 보이게 할 뿐이다."
외젠 프로망땅 eugene formentin)도 이와 똑같은 말을 했다.
"미술은 단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표현하는 예술일 뿐이다."
파울 클레는 분명히 추상화가가 아니었기에 위의 두 표현에는
차이점이 있다. 들레즈나 과타리에 따르면 '오고 있는 새'는 새 자신에
한해서는 일어날 수 있는 다른 무엇이 되는 과정에 있다. 다른 과정이란,
즉 클레의 경우에는 순수선과 색채로 되는 과정을 말한다. 1940년에
그린 클레의 마지막 몇 작품들에서 그는 단순하고 직접적이며 생동감있는
표현을 사용했다. '죽음과 불', '북치는 사람'등 비록 그런 화풍은
그의 마지막 작품 [아직 살아있는 still life]에서는 포기되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끝까지 테마, 상징주의와 전통적인 주제를
의식적으로 사용했다.
아폴리네르에 따르면 예전에 누군가에 의해 창작되었다기 보다는
차츰 형성되어진 듯이 보이는 시의 한 구절이 있다. 그리고 헨리 미쇼에
따르면 클레가 사용했던 색채들은 가끔 원초적 깊이에서 나타나 차츰
캔버스 위에서 살아나는데 적당한 장소에서 숨쉬게 된다.
예술은 건축이나 교묘한 솜씨나 우주나 바깥 세계와의 개인적인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소리없는 울부짖음이고 헤르메즈 트리스메지투스가
얘기하는 빛의 소리이다. 그리고 한번 완성되면 예술은 잠재적인 힘이
신비하게 예전부터 존재한다는 평범한 시각에서 깨어난다.
'취미- 파울 클레 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튀니스에서 가까운 성 - 56 (0) | 2017.02.17 |
---|---|
클레의 유리접시에 그리는기법 - 55 (0) | 2017.02.15 |
독창적인 클레의 작품세계-53 (0) | 2017.02.10 |
클레와 노발리스의 관계를 알아보자. 52 (0) | 2017.02.08 |
차가운 낭만주의- 51 (0) | 2017.0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