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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파울 클레 스토리

17번째 파울 클레의 이야기, 편지- [17]

17번째 파울 클레에 대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 편지글을 이어갑니다.

 

 

 

[귀하께서 당황하시는 것에 대해 상당한 실망을 느낍니다.

전문가이신 귀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때로 훌륭한 작가는 대중과 예술적인 견해 차이를 보일수 있습니다.

 

나를 타인과 비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저명한 비평가

호들러(hodler)씨에게만 내  작품의 비평을 허락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작품조차도 아무런 편견없이 냉철하게 비평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작품을 더욱더 훌륭하게 하기 위해서는 작가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가 필요하며,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해 확고 부동한

자신감을 가져야하며 작품의 부연 설명은 일종의 비평입니다.

1910년 10월 30일 쮜리히 가제트(gazette)에서 전시된 트로그(trog)에

대한  설명서를  첨부합니다.]라고 클레는 답장을 보냈다.

 

 

 

클레와 그의 친구들의작품은 대부분 비난을 받았다. 그당시

그들의 작품성향은 국가관, 도덕성, 종교적인 면에서

상당히  충격적인 반지향적예술세계로 보였기 때문이다. 보수성향이

강한 그당시 작가들은 비합리적인 창조,물질주의에  대한 승리감이나

주관적인 성향에 빠져있는 작품들을 내 놓고 있었다.

 

클레는 1906년 1월에 처음으로 깡디드(candide)에 대해 일기에

언급하지만 26점의 삽화 작품인 소묘와 묵화는 1911년에서 1912년까지는

그리지 못했다.이런 그림들은 삽화가의 작업과 그림에 대한

오랜  생각끝에 나온 것이다. 클레가 1909년 10월 7일 릴리에게

띄우는 편지에 '나는 삽화가로서 나만의 기술을 완성했소.'라는

구절이 있다.

 

그의 친구 손데레거는 그에게 쉬테른(sterne)의 감성적 여행'에

들어갈 삽화를 그리기를 권했으나 그는 볼테를의 [깡디드]'를 택했다.

[깡디드]에는 날 매혹시키는 우수한 면이 있다.

볼테르의 언어에서 매우 간결하고 정교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얘기의 등장인물의 정서면에 나타나는 괴기함이나 모험심은

그들의 삐뚤어진 외모에서 풍겨 나온다.

 

 

 

그 이야기안의 약간 꼭두각시같은 등장인물들은 실질적인 모습으로

바뀐다. 모순된 등장인물들에 푹 빠진 클레는 그들의 풍부하고 유연한

자질을 통해 무한한 변화가능성을 발견했다.

그의 친구들이 칭찬해 마지않았고 많은 출판업자들이 출판을 요청했지만

깡디드의 이삽화는 1920년 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삽화는 화가에게서 시의 내용을 조형예술로 다시  표현하는 중개자로

만든다. 그러나 삽화는 제공된 시의세계를 화가 자신만의 해석으로

끌어내기도 하고 시와 조형예술사이의 비밀스런 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깡디드를 위한 삽화는 클레에게 도전의 기회가 되었고

삽화를 완성시키는데 여러 해가 걸렸다.

 

 

 

그 책은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기에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다시 나 자신을 찾고있다]

가장 추상적으로 표현되는 그래픽 아트의 중심인 '선'이 하는

중요한 역할에 대해 클레는 '선'이란 볼테르의 매서운 풍자를 시각적으로

빠르게 표현하는 기본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1911년은 미래가 촉망되는 한 해였다.  클레는 다시 칸딘스키를 만났고

마케(macke)와 마르크(mark) ,야블렌스키(jawlensky), 아르프(arp),

쿠빈(kubin), 캄펜동(campendonk), 가브리엘 뮌터(gabriele munter),등과

친교를 맺었고 1912년 골츠갤러리에서 열린 43점의 청기사 그룹전을 보았는데

특히 헨리 루소와 로버트 들로네에 대해 관심이 갔다.

 

 

 

 

새로운 모임을 가졌으면 한다.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면 나는

그에게서 많은것을 배운다.그는 분명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아미에(amiet)와 그의 아내를 자주 만나던 카페에서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우리는 시가지를 정기적으로 도는 전차 안에서 자주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겨울 동안 나는 그의 예술가 모임 '청기사'에

참가했다."라고 썼다.

 

 

사실은 1909년 1월에 칸딘스키와 마르크는 쿠빈, 카놀트,호퍼,가브리엘 뮌터 등과

같은 독일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러 포코니에외 몇 프랑스인들과 데네소프나

블릭크형제 같은 러시아인들과 힘을합쳐 '신뮌휀예술가협회'를 설립했다.

1909년 12월에 탄호이저갤러리에서 '신뮌휀예술가협회'의 첫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클레는 1912년 2월에 열린 두번째 전시회에 참가했는데 그때

그의 '시적인 수채화'를 선보였다. 그의 작품옆에는 러시아의 목판화와

여러 화가들의 그래픽 작품들이 함께 전시되었다.

그당시에 20세기 예술의 근원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있는 지침서가

된 청기사의 연감이 만들어졌다.   

 

프란츠 마르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전통은 좋은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전통을 창조하는것이지

만들어진 전통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아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