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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파울 클레 스토리

클레의 기하학적 표현 기법-60

파울 클레의 기하학적 방법의 실험은 원근법과 기하학적인

방법으로 그의 회화에 등장한다.

 

다른 면에 그려진 작품은 입체파 그림의 구조로 밝게 색칠되어 있다.

그 그림은 1914년 튀니스에서 그린 그림[빨간색과 흰색으로 된 둥근 지붕]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뒷면에 그린 그림은 1919년에 이루어진 몇 점의 수채화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쥐르겐 글레스메르는 뒷면에 그린 그림은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입체파 적인 작품세계는 분명히 1914년 튀니스로의 여행때 우러나왔지만

이시기로부터 바로 나타난 것은 아닌것 같다. 클레는 이 여행 때부터

하나의 그의 그림 목록에 넣었는데 이것은 베의 클레 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클레가 튀니스 여행동안 이 그림에 대한 인상을 일기에 적었는데

'우리는 약간은 이상한 식물이 있는 공원을 걷는다. 그 식물은 연두 빛과

노란색이 감도는 적갈색이나, 그 식물은 내가 지금 이자리에서 그리지

않아도 내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이 그림 역시 마법의 사각형 시리즈를 유발시킨다.

휘청이는 원, 잘려진 원, 사각형, 사변형은 모두 바우하우스 시절에 가르친

'색채의 농담,강약 이동은 그림 내용의 팽창,축소 움직임과 관련되어 있다.

명암의 이동에는 주어진 방향에 의존하여 계속 엷어진다던가 혹은 계속

진해지는 일은 없다. 흰색을 향한 팽창은 정반대인 검은색 바탕위에서

한정된 밝기를 나타낸다.'는 내용을 그대로 예증하고 있다.

 

이것은 나중에 조심스럽게 고찰된 예술이 되는데 여기서 작업의 질서는

클레가 만들어낸 표시와 의미하는 것에 들어간다. 그것은 논리의 적용이

형태와 색깔과 리듬의 한정된 조직의 구별되는 언어에 속한다는 것이다.

 

클레는 펜으로 그린 소묘인 [게르츠호펜의 추억 memory of gertshofen]을 이미 좀더

사실적으로 그렸고 [거주자가 있는 방의 투시도 perspective of a room with inmates],

이 작품을 위한 스케치도 1921년에 했다.

 

그림의 기원은 알베르티와 뒤러로 되올라 간다. 키리코와 카라같은 화가들도

초현실주의적 방법으로 원근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바이마르에 사는 화가의 생활을 묘사했는데 피카소의 그림 [보에티 거리에

위치한 예술가의 작업실. 1919]에 나오는 쟝 콕토와 올가와 사티에의 자세와 비슷한

방식으로 클레, 릴리,  펠릭스도 조화롭게 위치가 정해져 있다.

 

거실은 가정적 분위기로 인해 영원의 상태로 상징되었다. 거주자와 물체들은

시공간적 흐름에서 비물질적인 성질을 지니게 된다. 현상학적 운동으로서

펼쳐진 형태 이론이 르네상스의 지친 원근법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다는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기에 보통 이미 유행에 뒤떨어진다고

생각되어졌던 형식적으로 분량을 재는 형태가 원근법의 지배로 증명된다.

 

카시르와 파노프스키가 '주관성과 객관화'라고 표현한 것이 클레의 손에

의해 '객관성의 주관화'로 바뀐다. 더이상 기하학적 방법은 없다.

기하학적 방법은 생활이라는 질적인 경험이 주는 생기로 그 자리를

빼앗겨 버렸다. 클레는 발전하는 '공간적인 해결'에 덜 심취해 있다.

 

공간적인 해결이란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정교함보다는

회화적 공간에 대한 현대적 시각이다. 여기 작업의 형성은 두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즉,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 통합에의 요구라는 한 측면과

전통적 예술 역사 기간 동안 이루어진 형성에 대한 풍부한 분석을

증명하는 다른 한 측면을 말한다.

 

이 수채화는 클레의 시적인 접근을 잘 나타내 주는 한 예이다.

그것은 분명히 원근법에 관한 지혜로운 교훈이다. 이 수채화는

바우하우스시절 첫 1년 동안의 강의에서 분발된 것이었다.

클레는 1917년 7월 10일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진압되지 않는 것 같은 흉폭함이 여기저기에서 절정에 달해 있다.

진상은 모든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